작가한설야는 카프의 맹원 혹은 계급주의에 철저한 작가로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작품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은 매우 적다. 그는 식민지 시기에서 리얼리즘 문학의 중요한 성과를 산출한 의미 있는 작가이다. 월북 이후엔 북조선예술총연맹 결성의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초기 북한 문단을 이끌어온
김남천, 한설야 등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수용논쟁, 농민문학론, 풍자문학론, 내용형식론, 혁명적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전개한 문제적 시인이다.
이병철도 주지하다시피 조선문학가 동맹의 신세대 시인 유진오, 박산운, 김상훈, 김광현 등과 함께 해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들어가 문학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고 ‘타방 밭은 교양을 가지고 평론이나 사설짜박지니’를 쓰면서 생활을 연명해 나갔던 김남천이지만, 리얼리즘으로 향한 정신은 그칠 줄을 몰랐고 그 근저에 놓인 부정의식은 바로 현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창작의 열정으로
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
1948년 8.15북조선최고인민회의 표창장 받음.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이 됨.
1950년 6.25동란 중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 12월 국방군의 북진을 따라 문화계 인사들이 이태준을 구출하
조선총독부 보관본인 密城 朴氏世譜에 의하면 증조 朴承鎭은 張仕郞, 조부 朴斗秉은 삼서관을 지냈으며, 부친 朴容桓은 주사였고 숙부 박용남은 무임교관승보정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태원의 아버지는 박용환이고 어머니는 南陽 洪氏이다. 그는 四男 二女중 次男이다.
박태원의 집안은
작가의 구속으로 김이 대신 쓴 것이라 한다. 카프 계열에서 쓰여진 농민 소설의 대표작으로서 노동 쟁의, 소작 쟁의 등 경제 투쟁, 농민 운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많은 도식성(圖式性)과 작위성(作爲性)이 드러난다. 무더위 속에서 농사일로 비 오듯 땀 흘리는 '인동이' 모자(母子)의 모습과, 시원한 마루
조선문단』, 1927, 제 19호, 위의 논문, p.135에서 재인용.
그의 리얼리즘은 단순히 현실 생활의 기록이 아닌 주관적 인식, 즉 개성과의 융합을 통해 이뤄진 리얼리즘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즉, 그가 생각한 진실은 작가의 눈을 통해 본 진실이다. 작가의 눈이란 작가의 주관이다. 그가 생각한 사실주의
작가 김기림(金起林)·이효석(李孝石)·이종명(李鍾鳴)·김유영(金幽影)·유치진(柳致眞)·조용만(趙容萬)·이태준(李泰俊)·정지용(鄭芝溶)·이무영(李無影) 9명이 결성하였다. 얼마 후 이종명·김유영·이효석이 탈퇴하고, 박태원(朴泰遠)·이상(李箱)·박팔양(朴八陽)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조용만
전체적 의식
작가의 작품들을 이해하고 그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인물의 행적을 알아보는 것은 필연적인 작업일 것이다. 더군다나 김남천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비평가로서 자신만의 이론들을 주장했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추상적인 것을 지양하였
작가라는 일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1920년에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로서 활약하였으며, 그의 문학은『폐허』의 동인으로 시작된다. 처음엔 평론가로 월평을 썼고, 김동인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1921년「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작가적인 실력을 나타냈다. 그리고 1923년까지「암야」,